[서평] ‘정치공학’의 미로에 빠진 진보진영에게 필요한 책
- 민경우의 <한국경제와 진보운동 / 열다섯의공감>
어느 순간부터 진보진영에서는 정치공학에 대한 이야기가 난무하기 시작했다. 비민주연합론, 진보대연합론, 반MB연대, 빅 텐트론, 복지동맹까지...각각이 무슨 차이가 있는지 일반 활동가들은 구분조차 힘든 각종 연합정치론이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어찌어찌 각 세력을 조합하면 ‘필승’이라느니, 어느 세력은 견제의 대상이니 아니니 하는 말들이 돌아다니고 사상과 이론을 이야기하던 주요 논자들은 갑자기 ‘정치공학자’로 변신을 시도한다. 이론의 혁신을 이야기는 것이 마냥 개량으로 치부되는 것도 당황스럽지만 정작 이론과 거기에 따른 노선도 없이 정치공학만 난무하는 것은 절망스럽다.
<진보의 재구성 / 시대의창>출간이후 1년 만에 다시 말 그대로 ‘문제작’을 들고 나온 민경우는 이런 세태에 일침을 가한다. 이 책 <한국경제와 진보운동 / 열다섯의공감>에서 민경우는 ‘시대정신’에 대한 성찰과 현실의 모순에 대한 치열한 고민도 없이 ‘이론’은 30년 전의 것을 고수하면서 ‘실천’은 선거용 정치공학에만 매달리는 현 진보진영을 예리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 비판의 키워드는 ‘한국경제’, 더 정확히는 서민대중의 경제생활과 진보운동의 발전과정에 한국경제가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분석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저자가 도출하고 있는 쟁점들은 현 진보진영의 입장에서 ‘문제작’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예민한 것임에 확실하다.
예를 들면 저자는 책에서 현 시점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 관계의 핵심적인 문제는 원하청 불공정거래가 아니라 중소기업이 생존할 수 있는 ‘수요’자체가 없다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또한 한국의 서비스업이 기형화된 것이 아니라 제조업이 기형화되어있는 것이라는 비판은 향후 생산직 노동운동의 전망을 두고 치열한 토론과 논쟁이 필요한 지점이다.
또한 ‘고용’문제가 세대별로 더구나 한 세대 내에서도 5년, 10년 정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매우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분석도 흥미롭다. 30대 여성고용문제가 심각하다는 이야기는 많이 하지만 30대 전반 연령대의 여성과 30대 후반의 여성들의 고용문제는 분명히 다르다는 저자의 지적은 진보진영이 구체적인 실천전략을 수립할 때 고민해봐야 하는 문제다. 깊이 있게 다루지는 않았지만 2010년 현재시점에서 왜 한반도 대 미국이라는 구도가 아니라 다극화라는 국제질서 속에서 한반도 정세를 보아야 하는지도 중국의 부상과 이로 인한 에너지, 통화질서, 군사력 균형 등의 변화를 예시로 들며 설명하고 있는 점도 흥미롭다.
이 책의 또 다른 장점은 사실 박세길이 썼던 ‘한국경제의 뿌리와 열매’라는 오래된 텍스트를 이제는 완전히 대체할 수 있을 만큼 풍부한 통계자료와 해당시기 정치사회적인 상황에 대한 분석, 진보진영의 대응과 대안까지 곁들이며 한국자본주의의 발전과정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단순히 <한국경제의 뿌리와 열매 / 돌베개>의 2010년도 개정판의 역할을 자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냉정한 비판을 통해 기성이론과 논리를 극복하고 있는 점이 더 큰 장점이다.
특히 필자가 일부러 최근 박세길씨가 “미래를 여는 한국인史(경제편) / 시대의창”에서 새롭게 펼치고 있는 주장에 적극적인 반론을 하고 있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30여년간의 한국경제의 발전 원인을 두고 ‘글로벌 수준의 기술’을 강조하는 박세길의 관점과 ‘글로벌 가수요’에 편승했다고 보는 민경우의 관점은 실천적 대응에 있어서도 향후에 큰 차이를 나을 수 있다.
최근에 일부 진보진영은 이론적 고찰이나 실천적인 검증과 고민도 없이 ‘복지국가론’에 휘말려 들어가고 있다. ‘복지국가론’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고민도 없이 이를 덥썩 품어버리는 태도가 문제라는 것이다. 한나라당이나 이명박 정부에 이길 수 만 있으면 대충 진보적 색채만 띄기만 하면 상관없다는 식이다. 이러다보니 민주당과 같은 보수정당에서 ‘담대한 진보’, ‘실용적 진보’, ‘따뜻한 진보’ 따위의 단어를 쓰며 진보논쟁을 벌이고 있어도 정작 진보진영은 조용할 나름이다. 정치공학이라는 미로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아무거나 불빛만 보이면 그 곳이 출구처럼 착각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미로에 빠지면 먼저 내가 지금 어디에 서있는지를 아는게 가장 중요하다. 한국경제의 발전과정을 분석하고 현 시점에서의 모순과 역량을 분석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런 면에서 민경우의 <한국경제와 진보운동>은 지금 우리 진보운동이 어디에 서 있는지는 알려줄 수 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Posted by haruka23